夜聽許十一誦時而有作(야청허십일송시이유작) 許生五臺賓(허생오대빈) 허씨는 오대산에서 불교를 배운 이로 業白出石壁(업백출석벽) 그의 고결한 수행은 분주의 석벽곡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네 余亦師粲可(여역사찬가) 나 역시 승찬과 혜가의 선을 배운 적이 있지만 身猶縛禪寂(신유박선적) 이 몸은 여전히 선적의 집착에 얽매여 있을 뿐이라네 何階子方便(하계자방편) 어찌하면 그대의 방편을 밟아 謬引爲匹敵(유인위필적) 외람되이 이끌려 필적하는 상대가 될 수 있을까요? 離索蔓相逢(이색만상봉) 사람들 곁을 떠나 쓸쓸히 살다 늦게서야 그대를
만나 包蒙欣有擊(포몽흔유격) 몽매함을 안아 주어 즐겁게 깨우침 받았습니다 (下略) - 하략 이 시는 두보가 천보 14년 장안에 있을 때 허씨가 시를 암송하는
것을 듣고서 즐거운 마음과 더불어 느낀 감회가 깊어 지은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두보는 자신이 선종에 입문하여 선종의 제2조인 혜가와 제3조인
승찬의 도를 배워 몸소 선사상을 실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두보가
선을 배우고자 한 것은, 어쩌면 현실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선적으로
도피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두보는 허씨와 달리 아직도
선적에 얽매여 있었고,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두보는 자신의 몽매함을 즐겁게 깨우쳐 주는 허씨가 고마울 뿐이다.
이 시는 앞에서 살펴본 다른 시와 달리 두보의 시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두보 자신이 선종을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밝힌 점이다. 두보는 이 시 외에도 '秋日夔府
懷奉寄鄭監李賓客一百韻(추일기부 회봉기정감이빈객일백운)'에서 자신과 선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秋日夔府 懷奉寄鄭監李賓客一百韻(추일기부 회봉기정감이빈객일백운) 行路難何有(행로난하유) 갈 길 어렵다는 말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招尋興已專(초심흥이전) 정공과 이공 두 분을 찾고자 하니 마음 이미 한결같아라 由來具飛楫(유래구비즙) 여태껏 쾌속선 준비하였으니 暫擬控鳴弦(잠의공명현) 잠시 거문고 줄 눌러 연주코자 하노라 身許雙峰寺(신허쌍봉사) 몸을 쌍봉사에 두고 門求七祖禪(문구칠조선) 칠조의 선문을 두드렸네 落帆追宿昔(낙범추숙석) 돛을 내리고 옛 생각 더듬으며 衣褐向眞詮(의갈향진전) 거친 베옷 입고 선의 세계 구하네 安石名高晉(안석명고진) 정공은 동진 명류이신 謝安 같은 풍류 지니셨고 昭王客赴燕(소왕객부연) 이공은 연으로 현사들이 오게 한 소왕의 장점 지니셨네 途中非阮籍(도중비완적) 반길 주인 있으니 길 막혀 울었던 완적 신세 면할
테고 査上似張騫(사상사장건) 배 타고 내려가니 뗏목 타고 황하 근원 찾았던
장건 모습이라 披闊雲寧在(피활운녕재) 거침없이 헤쳐 가니 구름인들 어찌 있을 것이며 淹留景不延(엄류경불연)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경물 때문에 시간 지체하지
않으리 風期終破浪(풍기종파랑) 바람은 끝까지 파도를 잠재우길 바라고 水怪莫飛涎(수괴막비연) 수룡은 풍랑을 일으키지 말지어다 他日辭神女(타일사신녀) 얼마 뒤면 무산의 신녀와 헤어질 텐데 傷春怯杜鵑(상춘겁두견) 봄을 타는 마음에 두견새 울음소리 두려워라 澹交隨聚散(담교수취산) 기주의 친구들과 헤어져 澤國遙회旋(택국요회선) 두 분 계신 강릉으로 아득히 돌아가리 本自依迦葉(본자의가섭) 본래 나 스스로 가섭의 불문에 귀의코자 했으니 何曾藉악佺(하증자악전) 어찌 일찍이 악전같이 신선술을 빌린 적이 있었겠는가? 爐峰生轉盼(노봉생전반) 눈동자 잠깐 돌려 바라보니 향로봉이 생겨나고 橘井尙高건(귤정상고건) 蘇耽의 귤나무는 아직도 馬嶺山 높이 자라네 東走窮歸鶴(동주궁귀학) 동쪽으로 가더라도 학이 되어 고향 찾을 것이며 南征盡접鳶(남정진접연) 남쪽으로 떠나면 솔개도 떨어뜨린다는 장기를 다
이겨내리 晩聞多妙敎(만문다묘교) 만년에 불교의 오묘한 가르침을 많이 들어 卒踐塞前愆(졸천새전건) 마침내 실천으로 이전의 허물을 다 막으리 顧愷丹靑列(고개단청열) 동진의 고개지는 瓦棺寺에 단청으로 유마힐상을
그렸고 頭陀琬琰鐫(두타완염전) 齊(제)의 王簡棲(왕간서)는 頭陀寺(두타사)에 미옥 같은 문장으로
비문을 지었네 衆香深암암(중향심암암) 뭇 향이 짙게 천지를 덮으니 幾地肅천천(기지숙천천) 곳곳이 碧色(벽색)으로 엄숙하구나 勇猛爲心極(용맹위심극) 용맹하게 떠나겠다는 마음을 극대로 키우며 淸영任體孱(청영임체잔) 파리하여 약해진 몸 방임해 버리네 金비空刮眼(금비공괄안) 금비로 눈병을 치료한들 부질없으니 鏡象未離銓(경상미리전) 거울 속 물상을 저울대로 헤아리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이 시는 두보 시 가운데 가장 긴 오언율시로, 두보가 대력 2년 강릉에
있던 鄭審(정심)과 伊陵(이릉)에 있던 李之芳(이지방)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에게 시로써
안부를 묻는 데 대하여 酬贈(수증)하며 지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칠조의 선문을 두드렸네"와
"거친 베옷 입고 선의 세계 구하네"라고 말했듯이, 두보가
예전에 스스로 선종을 배우고 실천하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앞서 살펴보았던 두보와 선사들과의 교류 차원을 넘어서
직접 선종을 탐색하려 했음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선종에 대한 탐색과
그 실천은 이 시의 후반부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여생을 불교성지를
두루 순방하고 고요한 참선과 불교의 이치를 깨닫기를 소원하여, "만년에
불교의 오묘한 가르침을 많이 들어, 마침내 실천으로 이전의 허물을
다 막으리"라고 다짐할 정도로 강력해진다. 특히 이 시에는 불교 용어와 불교 전고가 대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衆香深 (중향심 ) 은 {유마힐경}의 "有國名衆香(유국명중향), 佛號香積(불호향적)"을,
勇猛爲心極(용맹위심극)은 {능엄경}의 "發大勇猛(발대용맹), 行一切難行法事(행일절난행법사)"를,
鏡象未離銓(경상미리전)은 {원각경}의 "諸如來心(제여래심), 於中顯現(어중현현), 如鏡中像(여경중상)"에서
각각 인용한 것이다. 결국 이 시에는 두보가 만년에 선종의 妙理(묘리)와 진실한
깨달음에 의지해 해탈을 구하고자 한 심정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3.4. 韓愈(한유) 韓愈(한유;768∼842)는 字(자)가 退之(퇴지)로 중당을 대표하는 문학가이다. 그는
유종원과 함께 고문운동을 제창하여 '복고'를 기치로 삼아, 先秦(선진)과 兩漢(양한)의
산문전통을 계승할 것을 주장하고 文以載道(문이재도)를 강조하였다. 한유는 고문가답게 자신의 시풍을 尙怪(상괴)와 산문화의 방향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당시의 새로운 일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송대의 진사도는 그의 {後山居士詩話(후산거사시화)}에서
"퇴지는 문으로써 시를 쓰고, 자첨은 시로써 사를 썼다" 退之以文爲詩(퇴지이문위시),
子瞻以詩爲詞(자첨이시위사)라고 하였다. 한유는 중당의 대표적인 排佛論者(배불론자)이다. 그렇지만 그의 排佛(배불)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그가 활동했던 중당의 불교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 남북조 이후로 寺院經濟(사원경제)가 나날이 발전하면서, 불교는 사회생활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역량이 되었다. 더욱이 당의 통치자는 유불도 3교
병행 방침을 세워 불교세력에 대해서 의거하고 연합하며 이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일부 불교도들은 가사를 벗어 던지고 고급 관료가 되고자
했으며, 명리를 추구하고 사치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점차 종교적 기능을
상실하고 사회적 모순을 초래하였다. 이런 모순이 발생하자 당 무종은
불교를 없애고자 26만의 승니를 환속시키고 15만 개의 사원노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良田(양전) 수십만 경을 몰수하고 사원 수천 개소를 철폐하여
불교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당조의 불교와 도교의 숭상으로
승려계급에게는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부여했고, 이런 까닭으로 평민에게
이것이 과중하게 짐지워지자 병역과 부세를 피해 사원의 소작인이 되거나
승려가 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급기야 이러한 양상은 世族(세속)지주와
僧侶(승려)지주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더욱이 안사의 난 이후 승려들은 경제적 세력을 확장하면서 정치적으로
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덕종은 정원 6년 岐州(기주)에 풍년과 民安(민안)을
위한 목적으로 무하왕사에서 불공을 궁 안으로 들여와 공양했는데, 그것이
풍습으로 굳어졌다. 또 봉상 법문사의 탑 속에는 석가모니의 佛骨(불골;손가락
뼈)이 있었는데, 헌종은 원화 14년 한유가 刑部侍郞(형부시랑)으로 있을 때, 30년마다
열리는 法文(법문)이 있는 해에는 풍년이 들고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불골을 궁내에 3일 동안 안치하고 예배하면서 공경대신들도
이 예식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에 격분한 한유는 '論佛骨表(논불골표)'를
짓는다. 한유는 '논불골표'에서 배불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불교를 신봉한다고 하여 반드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해치고 경제적 악영향을 끼친다. 둘째, 석가모니는 오랑캐이므로 중국의
고유 사상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셋째, 불교에 대응하여 도통을 내세워
유가의 체계를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한유는 헌종의 노여움을
사 결국 潮州(조주)로 좌천되는 곤경을 치른다. 한유는 당시 그 누구보다도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논불골표' 때문에 좌천될 정도로 불교에 대하여 매우 반대 입장을
지녔던 그가 승려들과 교류하거나 산사에 놀러 간 일을 시로써 읊은
것이다. 이는 '山石(산석)'·'送惠師(송혜사)'·'送靈師(송영사)' 같은 작품에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먼저 한유 시의 대표적 작품인 '山石(산석)'을 살펴보자. 山石 (산석) 山石락학行徑微(산석락학행경미) 산 돌은 울묵줄묵 앞길은 좁은데 黃昏到寺편복飛(황혼도사편복비) 황혼에 절에 이르니 박쥐들 나네 升堂坐階新雨足(승당좌계신우족) 본당에 올라 섬돌에 앉으니 새 비 족히 내리고 芭蕉葉大梔子肥(파초엽대치자비) 파초 잎 넓고 치자 열매 탐스럽네 僧言古壁佛畵好(승언고벽불화호) 스님은 낡은 벽 부처 그림 좋다면서 以火照來所見稀(이화조래소견희) 불을 가져와 비치는데 보는 그림 희한하네 포床拂席置羹飯(포상불석치갱반) 자리 펴고 상 놓고 국과 밥 놓았는데 疏려亦足飽我饑(소려역족포아기) 궂은 밥 또한 나의 시장기 채우기 족하네 夜深靜臥百蟲絶(야심정와백충절) 밤 깊어 조용히 누우니 온갖 벌레 잠잠한데 淸月出嶺光入扉(청월출령광입비) 맑은 달 산을 넘어 사립으로 들어오네 天明獨去無道路(천명독거무도로) 날이 밝아 홀로 가니 길이 없어 出入高下窮烟비(출입고하궁연비)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안개구름 헤쳐 가네 出紅澗碧紛爛漫(출홍간벽분난만) 붉은 산 짙은 개울물 난만하게 엉키었는데 時見松력皆十圍(시견송력개십위) 이따금씩 보이는 소나무 참나무 모두 열 아름
넘네 當流赤足踏澗石(당류적족답간석) 물길 만나 발 벗고 개울 돌에 앉으니 水聲激激風吹衣(수성격격풍취의) 물소리 콸콸 소리내어 흐르고 바람은 웃옷을
스치네 人生如此自可樂(인생여차자가락) 인생은 이같이 스스로 즐길 만한데 豈必局促爲人기(기필국촉위인기) 어찌 구차하게 굴레에 매일까? 嗟哉吾黨二三子(차재오당이삼자) 아아! 우리 친구 두서넛 安得至老不更歸(안득지로불경귀) 편안히, 늙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리 시인은 德宗(덕종) 정원 17년(801) 7월 22일 李景興(이경흥)·侯喜(후희)·尉遲汾(위지분)
등과 함께 낙양 북쪽에 있는 惠林寺(혜림사)를 유람하였다. 그래서 이 시는 '山石(산석)'으로
題名(제명)되어 있으나, 실제는 혜림사의 정경을 통해 관직에서 쫓겨나 유람하면서
느낀 자신의 심정을 游記文(유기문)의 방식으로 읊고 있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시간은 황혼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까지로 대략
12시간인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인은 맑은 달빛이 사립문으로
들어올 정도로 좋은 날씨에 황혼 무렵 절에 도착한다. 그리고 깊은 밤
조용히 누워 풀벌레 소리를 듣고 사립문으로 들어오는 맑은 달빛을 감상하면서
잠에 빠져든다. 다음날 날이 밝자 다른 곳으로 홀로 가려 하지만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아 산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결국엔 시인과 동행한
친구들이 머물고 있는 절로 돌아오고, 다시는 굴레에 얽매여 있는 바깥
세상으로 가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기괴하고 난삽한 시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첫 구의 '? '은 산에 돌이 어지러이 있는 모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시인들이 많이 쓰지 않는 시어이다. 또 2구에서 시인 일행이
혜림사에 도착하니 박쥐만 날고 있다는 표현은 이 시만이 지닌 특징이다. 이 시를 보면 시인이 어느 정도 불교를 이해하고 있음을 불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스님은 벽에 그려진 옛 불화가 참으로 좋다고 하면서 불빛을
비추어 불화를 보여주고, 시인은 그 불화를 보고서 '희한하다'(稀;희)고
평가한다. 사전에 불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식견이 없으면 좀처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시인이 불화에 대하여
'희한하다'고 한 말에는 이미 다른 불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음을
반증한 셈이다. 더군다나 이 시의 마지막 두 구에서 흐르고 있는 '산사의 기쁨'은
유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불교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다가 상소를 올리고
좌천을 당했던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에 대한 입장이 이전과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지막 4구에서 나타나는 시인의 인생관에는
세간초월적 사상까지 노출된다. 즉 시인은 인생이란 즐길 만한 것이므로
굴레에 구차하게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고, 나아가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들 역시 늙을 때까지 좀처럼 산사에서 나가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한편 한유 시에 대한 선종의 영향은 시의 창작방법에서도 현저하게
드러난다. 한유는 시의 창작방법에 있어 불경게송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불경게송을 통한 시창작은 한유 이전에 선종의 영향을 받았던 한산자나
왕유 그리고 두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불경의 문체는 偈頌(게송)과 長行(장행)으로 나뉜다. 게송이란 장행과 상대적인
문체로서, 장행이 산문형식에 가까운 반면에 게송은 시에 접근해 있다.
게송은 일반적으로 사언과 육언이 번갈아 사용되기도 하지만 오언과
칠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가운데 오언의 句式(구식)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게송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 구식이 매우 정교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음절의 미를 체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게송은 비록 압운과 평측에
時調(시조)를 和諧(화해)하고 있지 않지만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그리고 이 점은
중국시가가 바로 요구하는 기준과 크게 부합되어 譯文體制(역문체제)의 출현으로
일종의 산문적 성격을 가진 '비시의 시'(非詩之詩;비시지시)를 산출했으며, 실제적으로
'문으로써 시를 쓰는'(以文爲詩;이문위시) 기풍이 형성되었다. 한유 시의 작시방법이 실제적으로 불경게송에 의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그의 '南山詩(남산시)'를 통해 살펴보자. 南山詩(남산시) (前略) -(전략) 或連若相從(혹연약상종) 혹 이어지기는 서로 좇아 노는 듯하고 或蹙若相鬪(혹축약상투) 혹 쭈그리기는 서로 싸우는 듯하네 或妥若미伏(혹타약미복) 혹 멈추기는 낮게 엎드리는 듯하고 或송若驚구(혹송약경구) 혹 두렵기는 놀란 꿩이 우는 듯하네 或山若瓦解(혹산약와해) 혹 흩어지기는 기와가 깨지는 듯하고 或赴若輻輳(혹부약폭주) 혹 한 곳으로 나아가기는 바퀴 살이 살통에 모이는
듯하네 (後略) - 이 시는 한유가 39세(807) 때 지은 작품으로,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을
묘사한 204구로 이루어진 장편시이다. 이 시에는 불경게송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이 나타나는데, '或(혹)'字가 117구에서부터 176구까지 무려
59회나 될 정도로 대량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흔적을 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한유가 이 시에서 시의 첫머리에 '或(혹)'자를 사용하는 방법은
曇無讖(담무참) 역 {佛所行讚(불소행찬)}의 번역문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불소행찬}은
馬鳴(마명)의 저작으로서 붓다의 전기와 생애를 묘사한 장편 서사시인데, 그
문장이 매우 화려하여 범어 불교문학 가운데 으뜸가는 작품이다. 더욱이
北凉(북량)의 담무참 한역본은 전편의 체제가 오언게송이고 한유의 '남산시'도
오언고체의 장편시여서 형식상 일치하고 있다. 또 담무참 역 {불소행찬}
[파마품]에 실린 길고 짧은 게송에서는 수십 번이나 '或(혹)'자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남산시'와 같이 각종 방식으로 詭異險怪(궤이험괴)한 사물의 형상을
묘사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한유의 시에 나타나는 선종의 또 하나의 영향은 시어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한유는 그의 시에 '何(하)'字를 반복제문의 구식으로 연속 사용하는
구법을 즐겨 사용하여 詩歌(시가) 언어의 산문화를 추구하였다. 그의 '贈別元十八協律(증별원십팔협율)'을
보자. 贈別元十八協律(증별원십팔협율) 子兮何爲者(자혜하위자) 그대여 무엇이 되려 하는가? 官패立憲憲(관패입헌헌) 갓에 옥고리 장식을 가득 달도록 하게 何氏之從學(하씨지종학) 누구를 따라 배우려는가? 蘭蕙已滿원(난혜이만원) 난초의 그윽한 향 가득 채우게 於何玩其光(어하완기광) 그 빛을 어떻게 즐기려는가? 以至歲向晩(이지세향만) 세월이 흘러 그대 늙더라도 子兮착如何(자혜착여하) 그대여 홀로 어찌하려는가? 能自媚婉娩(능자미완만) 능히 스스로 온순함을 아름답게 하고 金石出聲音(금석출성음) 금석과 같은 음성으로 宮室發關楗(궁실발관건) 궁전의 빗장을 열어도 何人識章甫(하인식장보) 누가 章甫의 관을 알아서 而知駿蹄원(이지준제원) 준마의 발걸음을 빠르게 하겠는가? 이 시는 '남산시'처럼 장편은 아니지만 한 수의 시에 '何'자가 5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구의 결구 방식은 이 시 외에도
그의 여러 시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그의 '孟東野失子(맹동야실자)'를 보자. 孟東野失子(맹동야실자) 失子將何尤(실자장하우) 자식을 잃었으니 장차 무엇을 탓하리요? 吾將上尤天(오장상우천) 나는 하늘을 우러러 탓할 뿐이니 女實主下人(여실주하인) 女實主(여실주)는 사람을 내려보냈으나 興奪一何篇(흥탈일하편) 목숨을 주고 뺏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고르지 못한가? 彼於女何有(피어여하유) 女主(여주)가 어딘가에 있다면 乃令蕃且延(내령번차연) 목숨의 번성과 오래 살기를 청하겠건만 此獨何罪辜(차독하죄고) 지금 그대 홀로 무슨 죄인가? 生死旬日間(생사순일간) 생사는 旬日間(순일간)이건만 (後略) -(후략) 이 시 역시 격 구절마다 '何(하)'字를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결국
'贈別元十八協律(증별원십팔협율)'·'孟東野失子(맹동야실자)' 두 시 모두 시의가 발전하는
단계에 산문방식을 주입하여 일종의 사고의 미를 체현하는 창작방법이다. 이와 같은 창작방법은 한유 이전의 당대 시가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시창작 방법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같은 방법이
한유의 시가 언어 산문화에의 노력이라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선종의
영향으로 생긴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한유 시에 나타나는 선종의 영향은 시어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유는 그의 시에 '悉(실)'과 '恒(항)'이라는 槪括語(개괄어)와 轉義語(전의어)를 잘 사용하여
공간과 시간의 연장을 나타냈다. 憶昨行和張十一(억작행화장십일) 近者三姦悉破碎(근자삼간실파쇄) 최근 삼간을 모두 파쇄하였으니 羽窟無底幽黃能(우굴무저유황능) 우굴은 그윽하게 빛나도다 鄭群贈점(정군증점) 倒身甘寢百疾愈(도신감침백질유) 몸을 자리에 누이고 달게 잠드니 백 가지 병이
없어지지만 欲願天日恒炎曦(욕원천일항염희) 도리어 천일이 아름답게 빛나기를 바라나니 이 시들에서 보여지는 '悉(실)'자는 공간을 개괄하며 '恒(항)'字(자)는 시간상의
연장을 표시한다. 이 두 구의 시를 살펴보면, 다섯 번째 글자인 '悉'과
'恒'字를 사용하여 작품의 표현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모두 불경게송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불교경전은 그 교의를 논술하는 데 시공관념의
분석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물의 발전 형태와 과정에 대한 판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경의 번역문에서 '실'자와 '항'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유의 시를 실차난타 역 80권본 {화엄경}에 실린 게송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화엄경}은 대부분이 칠언이며 형식상
매우 성숙되어 있으며, 다섯 번째 글자에 '悉(실)'字와 '恒(항)'字를 사용한
빈도가 매우 높아서 다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화엄경} 권11 [비로자나품] 光名所照咸喜歡(광명소조함희환) 광명이 비추는 곳마다 기쁨이 있나니 衆生有苦悉除滅(중생유고실제멸) 중생의 고통을 모두 제멸한다 {화엄경} 권13 [광명각품] 至仁勇猛悉斷除(지인용맹실단제) 지극한 자비는 용맹하여 모든 고통을 단제하나니 誓亦富然是其行(서역부연시기행) 마땅히 세운 바 서원을 행하기 때문 {화엄경} 권80 [입법계품] 宮殿山河悉動搖(궁전산하실동요) 궁전 신하가 모두 동요하더라도 不使衆生有凉怖(불사중생유량포) 중생으로 하여금 두렵지 않게 하나니 {화엄경} 권80 [화장세계품] 無量光明恒熾然(무량광명항치연) 영원한 광명은 항상 밝게 빛나서 種種莊嚴淸淨海(종종장엄청정해) 여러 청정해를 장엄하나니 {화엄경} 권36 [십지품] 三毒猛火恒熾然(삼독맹화항치연) 삼독의 맹렬한 불꽃이 항상 치연하여 無始時來不休息(무시시래불휴식) 무시 이래로 꺼지지 않는다 {화엄경} 권50 [여래출현품] 眞如離妄恒寂靜(진여리망항적정) 망념을 여읜 진여는 항상 걱정하여 無生無滅普周遍(무생무멸보주편) 무생무멸이건만 온누리 가득 퍼진다 한편 한유 시에 대한 선종의 또 하나의 영향은, 그의 시에 여러 가지
괴기한 사물 가운데 동물의 명칭, 예를 들어 "방합·고둥·물고기·자라·벌레"(蚌螺魚鼈蟲;방라어별충)
등을 빌려 자신의 의중을 빗대고 있다는 데 있다. 그의 시 '陸渾山火(육혼산화)'를
살펴보자. 陸渾山火(육혼산화) (前略) -(전략) 虎熊미猪逮후猿(호웅미저체후원) 호랑이, 곰, 순록, 산돼지, 원숭이, 水龍鼈龜魚與원(수룡별구어여원) 수룡, 자라, 거북, 물고기, 큰 자라, 鴉치雕鷹雉鵠곤(아치조응치곡곤) 까마귀, 올빼미, 수리, 매, 어린 고니,
곤계는 심포오외熟飛奔(심포오외숙비분) 통째로 구워질 듯한 불을
피해서 날고 달리네 (後略) -(후략) 이 시에는 여러 가지 동물들이 화염을 피해 달리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는데, 온갖 짐승들이 지축을 울리며 달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같은 시적 표현은 불경게송의 구법과 의상을 빌려 온 것이다. 불경게송에서는 神魔(신마)가 化現(화현)한 각종 괴이한 짐승을 조복하는 불보살의
위신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행문에서는 항상 동물의 명칭을
열거하여 幽玄(유현)한 종교적인 정신세계를 묘사한다. 修行本起經(수행본기경) 圍繞菩薩 三十六由旬
(위요보살 삼십육유순) 삼 십육 유순의 거리에 걸쳐
보살을 위요하였으니 皆使變成獅子熊비兇虎(개사변성사자웅비흉호) 모두 사자, 곰, 큰곰, 사나운
호랑이, 象龍牛馬犬豚후猿之形(상룡우마견돈후원지형) 코끼리, 용, 소, 말, 개,
돼지, 원숭이의 모습으로 변성하였다. {佛說섬子經(불설섬자경)} 獅子熊비虎豹毒蛇
(사자웅비호표독사) 사자, 곰, 큰곰, 호랑이, 표범, 독사가 慈心相向無傷毒
(자심상향무상독) 자심으로 서로 어울려 서로 해치지 않나니 {大寶積經(대보적경)} 獅子虎狼
(사자호랑) 사자, 호랑이, 熊비후猿궤
(웅비후원궤) 곰, 큰곰, 원숭이, 노루, 鹿라驢猪鬼
(녹라려저귀) 노새, 나귀, 들여우, 돼지,
토끼, 象馬拘犬 (상마구견) 코끼리, 말, 개, 牛羊猪類 (우양저류) 소, 양 등은 聞其聲音 (문기성음) 모두 그 음성을 듣고 可以喜悅
(가이희열) 기뻐하였다 위에 열거된 게송들의 시형은 4언에서부터 10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모두 동물들의 명칭을 계속 열거한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7언 게송은
한유의 시 '陸渾山火(육혼산화)'의 묘사와 유사하여, 한유의 시가 불경게송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더욱이 '陸渾山火(육혼산화)'는 불경게송 외에도 불교회화의 영향도 깊이 받고
있다. 앞서 '山石(산석)'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유는 불교의 벽화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그래서 錢仲聯(전중련)은 그의 [佛學與中國古典文學的關係(불학여중국고전문학적관계)]에서
한유의 시와 불교회화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陸渾山火(육혼산화)'에 묘사된 火神(화신)의
宴客(연객) 장면에서는 繁火(번화), 音樂(음악), 旗幡(기번), 賓從(빈종), 儀仗(의장), 酒肉(주육), 飮啖(음담) 등을 묘사하여
한 폭의 만다라를 보는 느낌을 준다고 하였다. 4. 끝내는 말 선과 시가 하나로 융합된 선시는 성당에 들어와 중국시가사상 처음으로
출현하였다. 그리고 선시는 '以詩寓禪(이시우선)'과 '以禪入詩(이선입시)'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뉘어 발전하였으며, 이 가운데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에 선을 도입한
'이선입시'는 한산자와 왕유 등과 같은 전문적인 선시 작가를 배출시켰다. 한산자는 처음으로 시에 선을 불어넣어 선시를 창작하였으며, 왕유는
남북종을 모두 섭렵한 선시의 거장으로서 맹호연·장계 등과 더불어
선시의 성행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보는 많은 선사들과 교류하면서 선을
배워 적지 않은 선시를 남겼으며, 한유는 중당의 대표적인 배불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게송의 창작방법을 폭넓게 수용하여 독특한 시세계를 열었다. 특히 선시는 송대에 이르러서는 선을 말하고 시를 짓는 것은 차이가
없다는 의식으로 확산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인식은
시는 물론이고 그림과 글씨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어, 시는
禪思(선사) 즉 선적인 사고가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그림은 선취를 귀하게
여기는 풍조가 일어 詩禪(시선)이니 畵禪(화선)이니 하는 용어들이 나타나 큰 영향을
끼쳤다. 참 고 문 헌 杜松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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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Influence and Contribution of the Chan
in Chinese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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