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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門正路에
나타난 如來禪의 특성 The Characteristics of 'Yeorae-Seon' in
the
Seonmun-jeongno 김 원 영 (Kim Won-young) 성철선사상연구원 운영위원
ssnim@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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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서 언
2.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난 如來禪(여래선)의 특징 2_1.여래선과
三解脫觀(삼해탈관) 2_2.여래선과
止觀(지관) 2_3.여래선과
十地說(십지설) 3. [禪門正路;선문정로]에 나타난
여래선의 특징 3_1.여래선과
조사선 3_2.여래선과
화두 참구 현재페이지 3_3.여래선과
三關 透過(삼관 투과) 3_4.여래선과
無生法忍(무생법인) 4.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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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여래선과 三關透過 (삼관투과) {선문정로}에서 정안종사들은 모두 寤寐一如(오매일여)의 경지를 투과하여 비로소
正眼(정안)을 얻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처럼 여래선에서 구경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매일여를 포함하여 세 단계의 관문 혹은 삼관이 있다. 삼관이라
함은 初關(초관), 重關(중관), 末後牢關(말후뇌관)의 세 관문을 가리키는 것인데, {선문정로}에서
삼관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에서는 이것을
주장하고 있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점수를 격렬히 배척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이 점수를 말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오해도 있었다. 먼저 삼관을 말한 부분을 살펴보자. 日間 浩浩(일간
호호)히 분주할 때에 一如(일여)하느냐. 답하되 一如(일여)합니다. 夢中(몽중)에도
一如(일여)하느냐. 一如(일여)합니다. 또 묻되 정히 熟眠(숙면)할 때에는 주인공이 何處(하처)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언어로써도 가히 대답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가히
伸說(신설)할 수 없었다. 먼저 일상에서 지극히 분주할 때에도 화두 참구가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觀(관)에 들어서 고요히 앉아 있을 때에 화두 참구가 순일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매우 분주하게 오가면서도 화두 참구가 그처럼 순일하여 차이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즉 動(동)과 靜(정)에서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의 관문 즉 초관이다. 다음은 낮 동안 의식이 깨어 있을 때에 화두
참구가 일여하게 되듯이 밤에 잠잘 때 꿈속에서도 화두 참구가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즉 몽중에도 일여한가 하는 것으로, 이것이 두 번째 관문
즉 중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이 아주 깊이 들어서 꿈도 없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화두 참구가 이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즉 숙면 중에도 일여한가
하는 것으로, 이것이 세 번째 관문이다. 이 세 단계를 두고 각각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라 하는데, 이 세 단계를 지나서 더 나아가야 구경인
여래선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몽중일여와 관련한 오매일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오매일여는 寤寐恒一(오매항일)이라고도 하는데, 이에는 몽중에서의 오매일여와
숙면에서의 오매일여 두 경계가 있다. 이 둘은 諸識(제식)과 十地說(십지설) 등과의
관계에서 볼 때 확연히 구별된다. 먼저 몽중 위의 오매일여는 제6의식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설법
기타에 아무리 능한 것 같아도 수면시에 캄캄하면 이는 전혀 제6의식
중의 사량분별인 知解邪見(지해사견)이요 實悟(실오)가 아니다"고 한다. 또한 이
몽중일여는 敎家(교가)인 화엄 7지에 해당하며, 이 제7지의 無想定(무상정)에서는 序重妄想(추중망상)이
습伏(습복)되므로 몽중에서도 화두가 여여하여 어떤 장애도 받지 않는다. 숙면 위에서의 오매일여는 다시 제8 아뢰야식의 微細妄想(미세망상)에 住着(주착)하는
8지 이상의 自在菩薩位(자재보살위)와 이 미세망상까지도 완전히 떠난 佛地(불지)에서의
眞如恒一(진여항일)로 나누어진다. 자재보살과 여래는 오직 멸진정의 一位(일위)만 남아
있지만 자재보살은 제8의 無記無心(무기무심)에서 일여하고 여래는 진여의 구경무심에서
일여하므로 진정한 일여는 불지의 구경무심뿐이다. 또한 제7지와 제8지와의 구별에 있어서 제7지까지는 加行(가행)이 있고
功用(공용)이 있지만 제8지 이상에서는 무가행, 무공용의 무심지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阿賴耶(아뢰야)가 남아 있어 미세하게 流住(유주)하는 假無心(가무심)이니,
이 미세를 永斷(영단)하고 대원경지를 實證(실증)하여야 眞無心(진무심)이며 正眼(정안)이다. 다시 말하면 몽중일여인 무상정에서는 제6의식의 추중망상이 떨어지는데,
이것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제7지 보살의 位(위)이다. 그리고 숙면일여인
멸진정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화엄 제8지 이상인 자재보살
위에서는 제8 아뢰야의 미세망상이 남아서 작용하고 있으나, 불지에서는
이 미세망상까지도 완전히 떠나서 구경에 무심하다. 그리고 {선문정로}는 말후뇌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자재보살위에서의
숙면일여 상태에 대해 상세하게 설하고 있다. 앞에서 오매일여에 대한 설명에서 보았듯이, 숙면일여에서는 추중망상인
제6 의식은 멸진하고 제8 아뢰야의 무기가 남아 있는 상태인데, 이것을
또는 大死(대사)라고 한다. 왜냐하면 一念不生(일념불생)하고 前後際斷(전후제단)하여 자기의 渾身(혼신)을
전연 망각하며 세간사가 있음을 보지 못하며 또한 세간의 塵勞(진로)가 그를
매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大死(대사)한 사람은 불법도리가 전연 없어서 玄妙得失(현묘득실)과
是非長短(시비장단)이 쉬어 버리므로 옛사람들은 이것을 '평지상의 死人(사인)'이라고
하거나 '見地(견지)가 淨潔(정결)하지 못하다'고 하거나 '命根(명근)이 단절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 상태는 생철을 두드려서 만든 사람과 같아서 혹 기특한 경계를
만나거나 혹은 惡境界(악경계)를 만나도 그의 면전에 있어서는 전연 몽중과 흡사하여
자기의 육근이 있는 것도 모르며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는 "外境(외경)과 諸心(제심)을 寂然息滅(적연식멸)하여 장벽이나 목석과 같은 무심경계"라고
한다. 또한 여기에서는 오직 화두삼매에 들어가 있으므로 "(밖으로)
사물을 抵觸(저촉)하여도 (화두가) 散去(산거)하지 않고 (안으로) 蕩蕩(탕탕)히 亡失(망실)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이 도리는 흡사히
개가 끓는 기름냄비를 봄과 같아서 핥으려고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나 버릴 수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一念不生(일념불생)하고 前後際斷(전후제단)한 勝妙境界(승묘경계)도 正悟(정오)가 아니므로 이
死地(사지)인 승묘경계의 大死(대사)한 상태에서 한번 뒤집어서 다시 大活(대활)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말후뇌관인 승묘경계의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비록 動相(동상)이 不生(불생)하나 도리어 淨裸裸處(정나라처)에 坐在(좌재)하게 되면 이것은
견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이것은 正知見(정지견)을 장애하며" 道眼(도안)을
障却(장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러한 경계에 도달하였어도
오직 轉身(전신)하는 대활로가 있어야 한다. 즉 숙면일여의 승묘경계는 깊은
선정의 상태이긴 하지만 그 선정의 淨裸裸處(정나라처)에 住着(주착)하여서는 아직 禪想(선상)이
남아 있으므로 이 淨裸裸(정나라)한 곳에서 다시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뒤에서
보듯이 不動(부동)이긴 하지만 아직 不禪(불선)이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단계가 말후뇌관으로 구경각은 이 단계를 지나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후뇌관인 숙면일여한 경지는 팔지 이상에서 등각까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十地等覺(십지등각)의 大死深坑(대사심갱)에서 忽然大活(홀연대활)하여야
梨耶(이야)의 無記(무기)까지 永滅(영멸)한 眞大死(진대사)이니 바야흐로 선문의 本分種草(본분종초)가 된다"고
하여 십지와 등각까지를 '大死(대사)의 深坑(심갱)'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앞의 몽중일여와
관련해 볼 때 8지 이상으로 한정해야 한다. 그리고 선문에서 정안종사들은
누구나 다 이러한 오매일여의 玄關(현관)을 투과하지 않은 바가 없고, 또한
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후에서 개오하였으므로 그 悟(오)는 究竟覺(구경각)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또한 "8식의 과臼(과구)를 타파하고 무명의 窟穴(굴혈)을 頓飜(돈번)하면 一超(일초)하여서
佛地(불지)에 直入(직입)하여 다시는 남은 법이 없나니 이는 上上利根(상상이근)의 실증한 바이다.
(중략) 眞(진)을 알지 못함은 다만 종전의 識神(식신)을 오인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량겁래의 생사근본이어늘 우치한 인간은 불러서 本來身(본래신)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一關(일관)을 투과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고 한다. 제8식을 自我(자아)인
本來身(본래신)이라고 오인하여 이에 집착하지만 마지막 관문을 투과함으로써
佛地(불지)에 直入(직입)하게 되고 다시는 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최후의 굳센 관문인 말후뇌관을 부수어 확철히 크게 깨쳐야만 비로소
옛사람의 입각처를 알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微細賴耶(미세뢰야)를
透脫(투탈)하여 말후뇌관을 타파하면 구경무심인 無上涅槃(무상열반)이 現前(현전)하여 大死大活(대사대활)하고
常寂常照(상적상조)하여 明暗(명암)이 雙雙(쌍쌍)이요 定慧(정혜)가 等等(등등)하니 즉 견성이며 성불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선문정로}에서는 삼관 중에서 중관과
말후뇌관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초관에 대해서는 거의
설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앞에서 보았듯이 {금강삼매경론}에서 삼해탈관의
수행에서 초지에서 동정일여가 된다고 하므로 초관은 보살 초지에서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3.4.
여래선과 無生法忍(무생법인) {선문정로}는 제5 無生法忍章(무생법인장)에서 무생법인과 관련하여 여래선에
대해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內心(내심)과 外境(외경)을 了亡(요망)하여 妄想(망상)이 生起(생기)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무생법인이니
본래부터 있는 것을 지금 갖는 것이다. 修道(수도)와 坐禪(좌선)을 假借(가차)할 것 없이
修治(수치)하지도 않고 生起(생기)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여래의 淸淨禪(청정선)이다. 무생법인에서의 선이 곧 여래청정선이라 하므로, 먼저 무생법인에
대해 살펴보자. 무생법인이란 내심과 외경을 요망하여 망상이 생기하지 않음이니
밖으로는 소취의 경계가 멸하여 남아 있지 않고, 안으로는 능취의 識(식)이
생겨나지 않음이다. 만약 意言分別(의언분별)로써 법의 무생을 관하여 散亂心(산란심)을
攝守(섭수)하여 무생의 경계에 머무는 것을 두고서 무생법인이라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무생의 경계에 머무는 그것은 바로 분별의
마음이 生(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 무생인이라 함은 心(심)이 무생의 경계에
住(주)함이 없음이며 또한 모든 분별을 떠남이다. 空境(공경)에 住(주)하는 能住心(능주심)이
없는 것이므로 生滅俱滅(생멸구멸)이라 한다. 그러나 이 滅(멸)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고 본래의 空(공)함에 證會(증회)한 것이므로 이 空寂(공적)은 能所平等(능소평등)하다. 따라서
"본래부터 있는 것을 지금 갖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여래
청정자성을 본래 갖추고 있음(本有;본유)을 비로소 자각함(始覺;시각)으로써 처음으로
갖추게 되는 것(始有;시유)이다. 이와 같은 청정자성의 本有(본유)함을 了覺(요각)하는 무생법인이 수행상의 어느
지위에서 인정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선문정로]에서는
"여래선을 내용으로 하는 馬祖(마조)의 돈오는 구경무심인 證悟(증오)가 분명하다.
마조뿐만 아니라 달마 직전의 정안종사들은 모두 무생법인을 圓證(원증)한
大聖(대성)들이다"라고 하고 있다. 돈오는 구경무심을 증오하는 것이며
또한 무생법인을 원증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구경무심이 무생법인이다.
즉 무생법인위는 究竟位(구경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의 지위에 頓入(돈입)하여 여래의 聖智(성지)를 自證(자증)함을 여래청정선이라
한다"라고 함에 있어서 원문에서 '여래선'이라고 한 것을 평석에서는
'여래청정선'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선문정로]에서는 여래선과 여래청정선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지위에 돈입함을 여래청정선이라고
하므로 여래선은 불지에서의 선을 가리킨다. 이 점은 이 법문에 대한
평석에서 "마조가 말한 여래선은 [능가경]의 究竟佛地(구경불지)를 표현한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결론이다. 따라서 여래선이 여래청정선이며
무생법인이며 돈오이며 구경무심이다. 즉 여래선이라 함은 구경 불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여래청정선에 대해서 "修道(수도)와 坐禪(좌선)을 假借(가차)할 것 없으며"와
"修治(수치)하지도 않고 生起(생기)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大抵 學道(대저
학도)하는 자는 우선에 반드시 雜學(잡학)과 諸緣(제연)을 倂却(병각)하고 결정코
一切 不求(일체 불구)하며 一切 不着(일체 불착)하여 甚深 妙法(심심
묘법)을 聽聞(청문)하되 屆耳(계이)함과 흡사하야
瞥然(별연)히 지나치고 다시는 追尋(추심)하지 않나니 이것이 甚深(심심)히 如來禪(여래선)에 得入(득입)함이
되어서 禪想(선상)이 生起(생기)함을 離脫(이탈)함이니라. 不動(부동)하여 不禪(불선)함이 卽是 如來禪(즉시
여래선)이니 禪想(선상)이 生起(생기)함을 離脫(이탈)하니라. [황벽어록]에 의하면 선을 익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모든 外緣(외연)을
쉬어 버려 일체를 구함이 없고 또한 집착함이 없다. 그리고 수행함이
純一(순일)하여 무슨 말을 듣더라도 이에 얽매이지 않게 되어 설사 부처님의
심심미묘법을 듣는다고 해도 마치 바람소리를 듣는 듯하여 이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한다. 즉 모든 시비분별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무생법인의
설명에서 말한 내심과 외경을 요망함과 같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甚深(심심)히 여래선에 得入(득입)함이 되는 것"이며, 이 경지가 되면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므로 "禪想(선상)이 生起(생기)함을 離脫(이탈)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禪想(선상)이 생기함까지도 떠나는 것이 여래선이라는 것이다. 또한 백장스님의 법문에서도 "여래선이란 不動(부동)하여 不禪(불선)함이며,
禪想(선상)이 생기함을 이탈함이다"라고 한다. 부동이라 함은 밖으로
온갖 생각들이 일어나는 움직임(動;동)을 쉬는 것이며, 불선이라 함은 안으로
모든 시비분별을 쉬어 버려서 모든 생각이 쉬는 것 즉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떠난 것이다. 앞의 {황벽어록}과 같이 여래선이란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모두 떠난 상태"라고 한다. 또한 六祖(육조)스님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도 없고(無生;무생) 멸도 없음(無滅;무멸)이 여래의 청정선이니라. 여기에서 무생무멸이라 함은 생각이 일어남이 없음(無生;무생)이며 또한
일어남이 없으므로 멸함도 없는 것(無滅;무멸)이다. 그러므로 앞의 부동불선과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무생무멸의 상태는 諸識(제식)과 망상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다.
망상을 그 상태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누는 경우에 추중망상은 6식 경계이고
미세망상은 8식 경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無生(무생)이란 제6 의식과 제7식의
추중망상은 물론이고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상까지를 멸진한 무생을
가리킨다. 따라서 무생무멸이라 함은 구경의 불지이다. 그런데 [금강삼매경]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음은 다른 사람들도
일찍부터 주목해 왔는데 이에 대한 원효의 해석을 살펴보자. 經(경):禪(선)은 곧 動(동)이나 不動不禪(부동불선)함이 無生禪(무생선)이다. 禪性(선성)은 無生(무생)이어서
生禪相(생선상)을 떠나고 禪性(선성)은 無住(무주)이어서 禪(선)함의 動(동)을 떠난다. (중략) 論(논):禪(선)은 곧 動(동)이라 함은 世間禪(세간선)을 말한다. 散亂(산란)함은 아니지만 境相(경상)을
取(취)하므로 相(상)을 取(취)하는 마음이 生(생)하여 起動(기동)이 生(생)한다. 이런 生(생)하고 動(동)하는
禪(선)을 떠날 수 있어야 理定(이정)에 들어갈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無生禪(무생선)이라
한다. 이런 理定(이정)은 性(성)에 生(생)과 動(동)이 없으므로 禪性(선성)은 無生(무생)이라 한다.
無生(무생)일 뿐만 아니라 또 寂(적)에 住(주)함도 없으므로 禪性(선성)은 無住(무주)라 한다. 만약
生(생)이 있다면 이것은 相(상)이고, 住著(주저)함이 있다면 이것은 動(동)이다. 이제 이것들에
反(반)하므로 따라서 禪(선)의 相(상)이 生(생)함을 떠나고, 禪(선)에 住(주)하는 動(동)을 떠난다. 이것은 理定(이정)을 밝힌 것으로, 이정을 無生禪(무생선)이라 하여 有生(유생)인 世間禪(세간선)과
대응하여 설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세간선 즉 세간에서 선이라 하는
것은 산란함이 없는 점에서는 禪(선)이고 定(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산란함은
없지만 그 寂相(적상)인 境界相(경계상)을 取(취)하는 것이다. 즉 動(동)을 떠나지만 적상을
취하는 마음이 生(생)하여 起動(기동)이 생한다. 그러나 진정한 선이란 寂(적)의 외경에
대해 적을 취하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적에 住(주)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이정 또는 무생선이라 한다. 이 이정인 선은 적정을 취하는 動(동)이 生(생)함이
없으므로 無生(무생)이고, 또한 寂(적)에 住(주)하지도 않으므로 無住(무주)이다. 즉 부동불선이란
산란함이 없으므로 부동이라 하고, 고요함도 없으므로 불선이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삼관 투과에 대한 해석에서 "삼관 돌파를 강조하는
뜻도 수행계위의 점차를 말하는 데 있기보다는 구경각에 못 미치는 데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즉 不住不禪(부주불선)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不動不禪(부동불선), 是無生禪(시무생선), 離生禪相(이생선상), 離住禪動(이주선동)의
네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부동불선, 시무생선, 이생선상이라는
구절은 {선문정로}에서의 여래선에 대한 설명, 즉 부동불선, 是如來禪(시여래선),
離生禪想(이생선상)이라는 구절과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부동불선인
무생선은 곧 여래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면 [선문정로]에서 강조하는 삼관 돌파에 대한 이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삼관 돌파를 강조하는 뜻도 수행계위의 점차를
말하는 데 있기보다는 구경각에 못 미친 데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즉 不住不禪(부주불선)함을 강조한 것이다. 5. 결 론 이상으로서 [선문정로]에서 말하고
있는 여래선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여래선이라 함은 선 수행을 통하여 여래장의 구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래선을 정안종사인 조사들이 서로 전하였으므로
이를 또한 조사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여래선과 구별되는 별도의 조사선이란
인정하지 않으며, 仰山(앙산)스님과 香嚴(향엄)스님 간에 오고간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이야기는 법문 擧量(거량)이라고 한다. 또한 고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은 하택신회와 규봉스님의 여래선에
대한 견해를 이은 것으로, 이것은 여래장에 대해 아는 것을 중시한 것이어서
육조스님의 주장과 같이 이것의 實證(실증)을 중시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둘째 여래선의 수행 방법으로서 오직 화두 참구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금강삼매경론}의 주장에 의한다면 대승 止觀法(지관법)의 하나로 이해된다.
그리고 다른 止觀行(지관행)과는 구별되게 화두는 참구하는 그 처음부터 定(정)과
慧(혜)가 둘이 아니며, 또한 止(지)와 觀(관)이 雙運(쌍운)하는 특색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定(정) 혹은 慧(혜)는 그 정도에 따라서 처음 화두를 들기 시작하는
데에서부터 구경에 이르기까지 대개 세 단계 즉 動靜(동정), 夢中(몽중), 熟眠(숙면)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선문정로]에서는 숙면에서의 오매일여를 말후뇌관이라고
하며, 특히 강조하여 禪門(선문)의 정안종사로서 이 경지를 투과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 점이 바로 性徹(성철)스님의 見處(견처)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불교의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경지를 實證(실증)한 스님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넷째 여래선은 그 선정의 힘이 구경에까지 곧바로 가는 것으로서,
이 구경을 무생법인 혹은 돈오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부동불선하며 또한
禪想(선상)의 일어남도 없으므로 무생선이라고도 하며 수도와 좌선을 하지도
않는다. 다섯째 여래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원효스님은 보살 초지에 들어가서
행하는 선으로 이해하였고, 보조스님은 三賢(삼현)인 十住(십주) 초에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성철스님은 화두 참구에 있어서 삼관을 투과하도록
일여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여래선은 그 시작에서부터 구경에
이르도록 일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각각의 주장은 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나 선종의 입장에서는 성철스님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여래선을 선종의 입장에서 이해할 때에 보살의 수행 덕목인
육바라밀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된다.
즉 삼관을 투과하여 구경을 얻고자 한다면 그 이전에는 바라밀행을 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오늘의 한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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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racteristics of 'Yeorae-Seon' in the Seonmun-jeong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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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Seonmun-jeongno(禪門正路),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
and Sudden Cultivation(頓悟頓修) is recommended as a proper way
to attain enlightenment, of which the Yeorae-Seon(Zen transmitted
by Tath gatha, 如來禪) is stressed to be practiced. Though the meditation
by Koan(公案) originally suggested by Tai-hui(大慧) in Song dynasty,
the characteristic of Yeorae-Seon that especially is described in
the Seonmun-jeongno also has to be examined since it has been transmitted
longtime ago. Here, we also examine the view on the Yeorae-Seon
by Song-chol(性徹), Won-hyo(元曉), and Shen-hui(神會) together.
Specially the standpoint of Won-hyo look to compromise the one of
Song-chol.
In his Commentary on Vajrasamadhi Sutra, Won-hyo alluded that
the Yeorae-Seon means the entering into the Tath gatha-garbha, which
is accomplished by the Threefold Vision of Unattachedness, or Mahayanic
View of Emptiness. Through the learning of the next two steps, that
is, the Listening of wisdom or the First Unattachedness and the
Thinking on Wisdom or the Second Unattachedness, the Third Unattachedness
or Cultivation of Wisdom would be allowed. Cultivation of Wisdom
is to be arise from the proper state of meditation, so it should
be refered to the Giving Up the Illusive Thinking. From the standpoint
of the theory of Ten Bhumis, this can be applied to the First Bhumi.
For Won-hyo, Yeorae-Seon denotes the Samadhi that is accomplished
at the stage of Boddhisattva's First Bhumi. Because this state is
the same with the tranquility and turmoil of everyday routine, from
the point of Three Stage, this is the sameness of move-and-stillness.
For Kui-feng(圭峯), Yeorae-Seon is to practice meditation after
under- standing on the fact that the nature of Tath gatha-garbha
is originally empty and tranquil. This is what is called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Cultivation(頓悟漸修). In this
context, the knowledge is more important. Ji-nul(知訥) said that
the enlightenment can be attainable in the First Step of Ten Stage,
thus it means to say that he enters the Yeorae- Seon. Once this
stage was called as the Insight into the Nature, the ortho-praxis
of Zen Buddhism but, this view is strongly criticized in the Seonmun-jeongno.
By the way, Yeorae-Seon(Zen Buddhism of Tath gatha) and Josa-Seon(Zen
Buddhism of Patriarch) have often been involved in the argument
about whether the both of them are same or not, which was originally
derived from the discussion by Yang-shan(仰山) and Xiang-yan(香嚴).
For this discussion Song-chol insists that the dialogue looks superficially
to tell the differences between Yeorae-Seon and Josa-Seon, but reflects
the equality of them. Song-chol also said that this is the very
essence of the Zen.
It is can be said that Yeorae-Seon described in the Seonmun-jeongno
would be available from the very beginning of Koan practice to the
ultimate state of Mindlessness.
Thus, there are different views on the Yeorae-Seon. First, Ji-nul
told that it is accomplished at the First Stage, for Won-hyo it
is at the First Bhumi of Boddhisattva, and for Song-chol it is at
the Ultimate Enlightenment. However, when it comes to the Utilization
of Mindfulness and Concen- tration together, Song-chol would get
it to correspond to Koan Prac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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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집_2 (2/2)
선문정로에
나타난 여래선의 특성_b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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