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唐代後期 儒學의 天 論爭과 理學的 思惟의
萌芽
종밀의 [원인론]에 나타난 유가 비판은 주로 韓愈(한유)의 天命
· 天人感應(천인감응) 등의 설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의 비판은 한유의 그것보다는 선진유가의 천명과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종밀의 비판은 유종원과 유우석의 견해를 반영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유에 대한 이해도 피상적이라는
한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 한유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天에 대한 문제 제기가 그에 대한 유종원
· 유우석의 반박에 대한 종합적
이해 없이, 선진유가의 천명론 혹은 동중서의 천인감응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여 왔다는 일부의 연구성과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했다. 물론 피상적으로 볼 경우 한유의 天에 대한 이해가 천명론이나 천인감응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天에 대한 이론을 엄밀하게 분석하면 그 가운데 기론적 세계의 이해방식과 객관적
· 보편적 원리로서의 天, 즉 理에 대한 이해가 제시되고
있는 맹아를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元和年間(806∼820)에 이루어졌던 韓愈(한유)
· 柳宗元(유종원: 773∼842) · 劉禹錫(유우석:
772∼819)
간의 天命에 대해서 論辨(논변)에 나타난 그들의 天論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당시 유학의 기론적 사유가 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理에 대한
개념이 소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韓愈의 [原道]와 宗密의
[原人論]을 중심으로 당시 유학의 논의가 어떻게 불교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 韓愈와
柳宗元(유종원) · 劉禹錫(유우석)의 天論(천론)에 대한 문제들을 고찰하고,
이를 토대로 다음 장에서 宗密의
原人論에 나타난 유학에 대한 비판과 불교,
구체적으로는 화엄학의 이론 전개 속에 나타난 기론적 사유의 발전과 그 전개인 理事法界(이·사세계)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먼저 말하면
한유의 천명에 대한 논의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종밀의 [원인론]과 그의 법계론을 하나의 발전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논의를 분명히하기 위해서 먼저 유우석의 견해를 빌어 당대 후기 유가의 天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유우석은 당시 天에
대한 해석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陰즐說(음즐설)과 自然說(자연설)이 그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陰즐說은 천과
인간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天與人實影響: 천여인실영향), 즉 하늘이 사람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고, 自然說은 천과 인간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天與人實相異) 입장이다. 전자는 한유의 견해로 天人感應(천인감응)을, 후자는 유종원과 유우석의 견해로 天人不相預(천인불상예)의
입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입장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한유는 유종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인이
어떻게 감응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은 유종원의 천설에 나타난 한유의 견해를 인용한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하늘의 이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네. 지금 사람들은 질병으로 시달리거나 고생스럽고 춥고 배고픔이 심할 때면
하늘을 우러러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득세하고 백성을 돕는 자들은 도리어 재앙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울부짖으며 '무엇 때문에 이런
큰 고난에 빠뜨리십니까'라고 하늘을 향해 하소연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모두 천리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 이제 인간들은 이러한
하늘의 이치를 모르는 탓에 하소연도 하고 원망도 한다. 나는 만약 하늘이 그들의 하소연과 원망을 듣는다면, 하늘에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큰 상을 내리고 하늘에 공로가 없는 자에게는 큰 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대(유종원)는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유는 유종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람은 고통이 있을 때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고, 하늘은 그 소리를 들은 후에 상과 벌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결국에는 하늘에 공로가 있고 없고에 따라 상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천에 대한 견해를
천명적으로 혹은 천인감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한유의 천에 대한 견해를 天命(천명)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吉凶禍福(길흉화복)이 무조건적으로
天命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천인감응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천인감응에 대한 견해는 동중서의 그것보다
객관화된다. 즉 天(천)이 意志(의지)를 가지는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절대법칙처럼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기준에 합당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감응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파괴를 말하면서 인간의 제 행위들이 벌레만도 못한 행위라고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있다. 인간의 원기음양에 대한 파괴도 더욱 심해진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산림을 벌채하고, 샘을 뚫어 우물물을 마시고, 묘를 파서 죽은
이를 장사지내고, 구덩이를 파서 변소를 만들고, 담이나 성곽 · 망루
· 놀이터를 축조하고, 하천 · 도랑 ·
연못을 파고, 나무를 부벼 불을
지피고, 금속을 녹이고, 질그릇을 굽거나 돌을 다듬고 하기에 황폐화되어 온 세상의 만물은 그것의 情(본성)을 얻지 못한다. 분노에
차서 바삐 왔다갔다 하면서 나머지도 모두 없애는 것을 그친 적이 없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원기음양을 해치는 것은 벌레가 하는
것보다 심하지 않은가. 한유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연 파괴 행위이고, 따라서 天의 관점에서는 벌의 대상이다. 때문에 이러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이 인간 중심적 잣대에 의해 하늘을 원망하는 것은 天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 이러한 이해의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이유는 다음의 인용과 함께 대비시켜 보면 한유가 생각하고 있는 天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조물주의 궁극적인 의도가 결국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의 好惡(호오)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것은 아닐까. ··· 같은 사람이라도
호오가 이와같이 다른 것을 놓고 볼 때 하늘과 인간은 반드시 호오가 다를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늘과 일치되면서 인간과
괴리되는 생활을 한들 무슨 해가 되겠는가. 즉 한유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 간의 好惡가 같지 않듯이 天과 사람의 好惡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사람의 好惡가 天의 의도와 합치되면서 일상과 괴리되는 삶의 문제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세계의 이해
방식으로서의 기론적 사유에 윤리도덕의 의미가 도입되는 사유의 전환적 이해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한유의 天에 대한 이해를 오늘의 현실 문제와 견주어 보면 그의 천에 대한 이해는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제반의 여건들이 축적된 결과 자연(환경)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더 이상 인간은 자신의 편리만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시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즉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보편리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 있는 天 개념의 의미는 우주 자연의 보편리라고까지 해석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天에 대한 문제를 천인감응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동중서의 천인감응론이 객관화되고 있으며, 天
개념은 뒷날 理 개념으로 정립되는 과도기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한유의 천에 대한 견해에 대해 유종원은
[天說(천설)]을 지었는데, 그는 천지가 초목과 같은 자연물인데(↓) 어떻게 상벌을 줄 수 있는가라고
반박하면서 공을 이룬 사람은 스스로 공을 이룬 것이고 화를 당한 사람은 스스로 화를 부른 것이니 하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天人不相預(천인불상예)의 견해를 주장하게 된다. 참고
>인간을
자연물로 파악하는 견해는 한유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하늘이라고 하고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땅이라고
하며 그 사이에 살도록 지명된 것을 인간이라고 한다.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일월성신이 모두 하늘이다." ··· 온 천지는 커다란 과실수이고 원기는 (그 나무에 돋아난) 커다란 옹이덩어리이며 음양은 커다란 초목이다. 그런데 어떻게 잘한
일에는 상을 주고 잘못한 일에는 벌을 줄 수 있는가. 유종원의 주장에 의하면 천지만물의 본원은 무형이면서 물질적인 원기이다. 삼라만상은 음양의 이기가 부단히 자기 운동하는 형태에
불과하다. 하늘이 인간에게 상벌을 내리는 일은 없으며 공적도 과실도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하늘은 자연의 생성변화를 주관할
수는 있으나 예의를 제정할 수 없고 의지를 포함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은 예의를 제정하고 의지를 가지지만 사계절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재앙을 복으로, 굽은 것을 곧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의 힘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종원의 이러한 견해는 유우석에 의해 보다 발전된다. 유우석은 유종원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天論]을 지어 天人交相勝(천인교상승)의 견해를
주장한다.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은 인도가 밝아서 그 유래하는 바를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덕과 원망이 하늘에 돌아가지 않는다.
난리가 일어나는 것은 인도가 어지러워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은 모두 하늘에 돌린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작용이 있고, 하늘과 사람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작용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늘의 작용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사람의 작용도 하늘이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天이 능한 바는 만물을 행하는 데 있고, 사람이 능한 바는 만물을 다스리는
데 있다"고 말함으로써 하늘의 현상과 인위적 행위들을 구분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사람이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사람이 하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법이다. 법이 크게 행해지면, 옳은 것은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며 그른 것은 모든
사람이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도를 실천하면 반드시 상을 주고 선을 어기면 반드시 벌을 준다. 그는 하늘은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법칙과 시비를 견지할 수 있으면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까지 주장하게 된다. 여기서
유우석의 천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인간의 주체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은 한유가 제기한 문제의 연장선에서 발전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분해 설명하면 한유가 天의 개념을 보편 법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제시하였다면, 유우석은 그것을 구체적인
法이라는 개념으로 풀이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法이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理라는 개념도 사용하는데, 理로 생각하면 만물은 하나로
관철된다고 말하는 것은 天 개념을 法으로 풀이한 것과 함께 理學의 확립이라는 발전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Ⅳ. 宗密의『原人論』에 나타난 氣論的 特性과
理事 종밀의 [원인론]은 당대 후기 유학에서 나타나고 있는 천지만물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시키는 한편, 그의 理事法界論(이사법계론)까지를 고려한다면 당시 유가의 천명 . 천인감응설에서 전개되는 객관적 사물 이해로 나타난 天
· 法 · 理
등의 개념을 발전시켜 理 개념을 확립시켜 주고 있다. 종밀은 불가적 입장에서 유가 · 도가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의 비판의 초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기론적
세계 이해와 천명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유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요즈음 유교나 도교를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주장을 볼 것 같으면 다음과 같다. 즉 외면적으로는 내 몸은
부모로부터 그 부모는 또 그 위의 부모에게 이어서 육신을 물려받아 이 몸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깊이
들어가서는 원초적으로 커다란 기운이 존재하는데 이 기운이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고 이 둘이 하늘
· 땅 · 사람 셋을 만들어 냈으며 그 셋이
어우러져 모든 만물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람은 모두가 기를 근본으로 한다고 한다. 종밀의 유학에 대한 비판은 기론적 이해 방식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람은 모두 원초적인
기운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과 그 기의 聚散(취산)을 문제삼는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의 비판은 주로 도가에 더 맞추어져 있다. 그렇다면
그의 유학에만 국한된 비판은 결국 천명에 관한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할 수 있으며, 유학의 기론에 대한 비판 역시 天(천)의 개념이나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제시된 것이라는 점이라고 보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학과 도교에서는 사람과 동물 따위는 모두 아무런 형태도 없는 위대한 도가 낳아 주고 길러 준다고 말하면서, 도는 자연을 본받는
것으로 원기에서 생겨나고 원기가 (나누어져) 하늘과 땅이 생겨나고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한 인간의
어리석음 · 지혜로움 · 천함과 가난 · 윤택함 ·
괴로움 · 즐거움 따위는 모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며 때와 천명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뒤에는 다시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고 형태도 없는 위대한 도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종밀은 위의 인용에서
[원인론] 序(서)에서 비판하고 있는 유 · 도에 대한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 주는데, 앞에서 살펴본 당대 후기
유학의 天(천)에 대한 논의들과 연관시켜 보면, 그의 유학에 대한 비판이 때와 천명(時
· 命)에 관한 것임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당대 후기
유학에서의 天 개념은 천명과 천인감응으로 이해하기에는 객관화된 방식을 견지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종밀의 유학에 대한 비판이 무엇인가라는 내용보다 종밀이 자신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개진시켜 나가는
부분이다. 성이 선한 사람은 보시와 지계 등을 행해서 심신이 이 선업을 싣고 중음에서 운용하다가 모태 가운데 들어간다. 기와 질을 품수하면
기는 문득 사대를 갖추고 점차로 諸根(제근)을 이루며, 심은 문득 사온을 갖추고 제식을 이룬다. 10개월이 차서 나오면 사람이라고 부르니
지금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그것이다. ··· 그러나 품부 받은 바 기를 전전 추본한즉 혼일한 원기요, 일어나는 바 마음을 전전 궁원하면
곧 진일한 영심이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고 원기 또한 심이 변하는 바를 좇아 앞의 전식이 드러낸 경에 속하는
것이며 아뢰야식에 포섭되는 것이다. 종밀은 객관화된 세계를 일원기와 같은 것으로 보고 기개념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종밀 자신이 사람이 품부받은 기의
근본을 추구하면 혼일한 원기이며, 일어나는 바의 마음의 근본을 궁구해 보면 靈心(영심)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기의 주체인 靈心 즉 불성이 본체라는 것인데, 그것은 일원기 자체가 대상세계를 인정하면서도 선과 앎의 주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기의 개념을 궁극적으로는 윤리도덕의 문제와 心의 인식 문제에까지 확대시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마음(心)과 대상(境)이 모두 空(공)이라는 불교의 기본이론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유학(·도가)의 원기론을 받아들인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종밀이 한유에 의해서 단적으로 드러났던
대상세계에 대한 기론적 이해를 윤리도덕의 영역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에서
진일보하여 인식의 영역으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다시 기론적 맥락에서 心(심)과 境(경)을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여의 일념이 움직이기 시작한 최초의 상태로부터 나누어져 心(심)과 境(경) 둘이 되는데 心은 이미 세밀한 것으로부터 조잡한 것에 이르러
끊임없이 망령되이 헤아리고 업을 짓는 데 이른다. 境 또한 미미한 것으로부터 확연히 드러나는 것에로 이르러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이에 하늘과 땅이 되기에 이른다. ··· 이에 근거하면 심식이 변화한 境은 두 부분이 되는데 하나는 심식과 화합한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심식과 화합하지 않은 하늘과 땅, 산과 강, 나라와 도읍이다. 여기서 그는 元氣(원기)가 전식에 포함되는 것, 즉 감각적
·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으로 대상계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아뢰야식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다시 말하면 元氣는 대상계와 8식이 변화하여 드러내는 대상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종밀은
心과 境은 주관과 객관이며 인식주체와 대상을 설정하면서도 그 주체는 인식주관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그는 종국에는 영심의 인식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여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은 인식의 대상세계인 경을 다시 둘로 나누어 심식과 화합한 인간과
심식과 화합하지 않은 천지만물을 구분한다. 그렇다면 종밀은 유 ·
도의 원기설을 불교의 심식이론 속으로 편입시키면서도, 기의 세계의
객관성을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종밀은 출세간적인 불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대상세계의 객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세계에 대한
기론적 논의를 전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주체인 인간의 의식에 머물고 마는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그의 性起論(성기론)(↓)이나 理事法界論(이사법계론)(↓)까지를 의식한다면 인식 주관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지성사적 맥락에서 볼 때 理라는 개념을 정립
· 제시하는 데까지
심층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참고
>종밀은
'圓覺經大疏(원각경대소)'에서 性起(성기)의 문제를 인식(識)의 문제로 환원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모두 실체가 없는 헛된 것이다. 그것은 인연이 모여서 생긴 것으로,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은 본래 실체가
없다. 그것은 오직 識의 작용으로 생겼는데, 이 識도 헛깨비나 꿈처럼
실체가 없다. 다만 一心만이 허망하지 않다. 마음의 작용은 고요하면서도
무엇을 인식하는데 이것을 일러 圓覺(원각)이라고 한다. 마음은 깨끗함이
가득하여 그 속에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덕의 작용은 끝이 없는데,
모두 동일한 性(성)이다. 性이 작용하여(性起) 대상세계를 마음속에
표상시켜 형상(相)을 만들어 대상세계(境:경)와 그 대상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주체(智: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相을 얻고 性이 융합되어
몸과 마음이 뚜렷해진다." 참고
>종밀은
杜順(두순)의 '華嚴法界觀門(화엄법계관문)'의 四法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注를 달면서
두순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청량(澄觀:징관)은
신경소에서 유일진법계를 통하고 만유를 총해하는 것은 곧 一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즉 심은 만유를 융통하여 곧 사종법계를 이룬다. 一(일)은
사법계이니 계는 分의 뜻인 바 일일차별의 분제가 있기 때문이다. 二(이)는
이법계이니 여기서 계는 性의 뜻인 바 사법이 무진하나 동일성인 까닭이다. 三(삼)은 이사무애법계이니 성과 분의 뜻인 바 성분은 무애한 까닭이다.
四는 사사무애법계이니 일체 분제의 사법이 일일여성으로 융통하여 중중으로
끝이 없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그가 제시한 화엄의 理나 事는 심식이 대상세계를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실제 객관세계를 표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객관세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인식된 그 불성 자체를 객관화시킨 것이 理라고 한다면 理
· 性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시 말하면 인식된 대상은 사람의 인식 밖에 독립한 절대적 존재가 아니며, 단지 주관적 인식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객관적
대상세계는 인식의 기초이며, 인식의 주체는 대상세계의 주체이다. 이렇게 볼 때,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식대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종밀의 이사론은 대상세계와 인식주체인
氣가 그 원리인 理와 그에 대한 지각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본체론 ·
심성론이 일관된 체계로 설명되는 데에는 이학적 사유를 기다려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대상세계뿐만이 아니라 그 본체론적 이해, 인식주체인 인간의 심성정까지를 포괄하는 이론적 체계로의 정립은 정주이학에
이르러야 비로소 해명된다는 것이다. Ⅴ. 結 論 이상에서와 같이 당대 후기의 유학사상과 종밀의
[원인론]을 중심으로 유 · 불의 道와 天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기론적 사유의 발전과 理에 대한 사유체계의 맹아가 싹트고 있음을 사상의 발전이라는 지성사적 맥락에서 고찰하여
보았다. 이 고찰을 통해서 단편적이나마 유 · 불의 비판이 지엽적
· 피상적이었다는 한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 유
· 불의
정확한 이해 결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유의 비판뿐만 아니라 종밀의 비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상호 비판과 견제는
유교와 불교의 이론 정립에 자극제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사상사적으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정리해 보면 첫째, 당대 후기의 유학은 대상세계에 대한 기론적 전개를 통하면서 天의 개념에 理的 요소를 가미시킴으로써 氣 개념을
윤리도덕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元和年間(원화년간)의 天(천)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소박한 형태의 理 개념이 도출되고 있음을 보았다.
종밀은 이것을 인식의 문제로 환원시켜 해석함으로써 윤리도덕의 문제를 인식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둘째, 유학의 현실 중심적인 사고와 불교의 출세간적 사고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조가 상호 영향을 주며 발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종밀의 대상세계와 그 인식주체로서의 氣에 대한 이해는 불교의 인식 문제가 현실적인 차원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되 출세간적인 것에까지 일관되고 있음을 밝히려는 것으로, 이것 역시 중국의 지성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성사적 맥락에서 볼 때, 유
· 불의 이론은 사조를 뛰어 넘어 견제와 비판 속에서 심화
· 발전되었으며, 송대
이학까지를 의식한다면 당대 후기의 원숙한 형태의 기론적 사유가
天(천)에 대한 유학의 자기 논변을 통한 발전과 유
· 불의 상호 비판 속에서
한편으로는 윤리적 · 인식론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론적 사유로 발전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參 考 文 獻 韓 愈,『韓昌黎全集』, 新文豊出版社, 1977. 劉禹錫,『劉禹錫集』, 中華書局, 1990. 宗 密,『原人論』(大正 45).
,『注華嚴法界觀門』(大正 45). ,『圓覺經大疏』(卍字續藏經 14).
淨 源,『華嚴原人論發微錄』(卍字續藏經 104). 勞思光,『中國哲學史』, 臺灣, 三民書局, 1981. 신규탁,「人間論에 대한 宗密의 理解-『原人論』을 중심으로」,『동양고전연구』제3집,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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